2004-03-27 구미 아카데미 극장에서...
간만에 보는 영화 한편
원룸에서 사택으로 이사한지 3~4달이 지났다. 이사를 하고 난 이후로, 희야가 집으로 두번째 찾아온 날이었다. 간만에 희야가 올라온 김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결혼한 이후로 영화를 본 적이 거의 없는데다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 거리에 영화관도 있고 해서, 영화 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1, 2관이 있었고 각각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를 상영하고 있었다. 둘 중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태극기 휘날리며'를 선택하게 됐다. 아무래도 희야가 장동건이랑 원빈 나오니까 그걸 보자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만족스러운 3류 영화관
옛날에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영화를 보러 극장엘 간 적이 있었다. E.T 였던가... 아카데미 극장을 들어갔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표 파는 곳 바로 옆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면, 표를 받는 할머니가 계셨다. 젊고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가 인사를 하며 표를 받는, 부산에서 찾아간 영화관과는 참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영화 상영관을 들어가기 전에 있는 복도에는 벽에 붙어서 가로로 길게 늘어진 좁은 나무벤치가 있었다. 극장이 낡아서인지 토요일이었고, 백화점 옆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러 찾아온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3류 극장엘 괜히 찾았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 생각은 이내 깨어져 버렸다.
누가 그랬던가... 그 집의 수준을 알려면 화장실을 가보면 된다고... 희야도 나도 화장실을 찾았을 때 참 깨끗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세면대나 소변기, 문짝 등은 옛날 디자인이라게 확실했지만, 지저분하다라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화장실 내부 조명도 밝아서 오히려 깨끗하게 잘 관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영관 의자도 낡아서 푹신한 느낌은 덜 했지만, 부서지거나 삐걱거림도 없고 주변도 참 깨끗했던 게 정말 기억에 남는다.
영화보러 간거냐, 영화관보러 간거냐
얘기가 옆으로 샜는데 ^^;;; 아무튼 걱정과 달리 순조롭게 영화관람이 시작되었다.
영화의 초반부터 장동건(이진태)과 원빈(이진석) 이 두 사람이 청년 무렵의 형제 모습으로 등장한다. 샘이 날 정도로 사이좋은 남자형제의 모습으로 말이다. 아버님은 어릴 적에 돌아가셨기에 어머님은 시장에서 국수 장사를 하시고, 형 진태는 구두닦이를 한다. 동생 진석은 심장이 약해서 수시로 심장약을 먹으며 학교 공부를 하는 학생이다.
진태는 자기가 못배우고 못가지더라도 동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행복해 하는, 때로는 친근한 형이면서도 때로는 아버지같은 자상한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곧 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기준이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누구나에게 일어났음직한 일들이라는 점이다
우리 세대 뿐만 아니라, 내 아버지 세대 이후로는 전쟁이란 소재에 대해 피부로 공감하긴 힘들 것이다. 전쟁을 겪었더라도 아주 작은 어린아기였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군에 다녀온 남자가 아니라면 화약냄새 조차 맡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시 전쟁 상황에 빠져들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역사시간이나 사회시간에 배웠듯 형 진태는 가족들을 데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피난길에 나선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족들을 챙겨야만 한다. 그러던 와중에 약을 구하기 위해 진태가 군중속을 비집고 다니는 동안, 때마침 그곳에서 군인들에 의해 동생 진석이 강제로 징집되어 끌려가고, 동생을 구하러 간 형마저 함께 끌려가게 된다.
가족들과 함께 뭉쳐있어도 그들을 제대로 돌봐주기 힘든 전쟁상황에서 급박한 나라 사정때문에 강제로 남자들을 징병해야하는 국가적 상황이 정말 안타깝기만 한 순간이다. 그들이 없다면 누가 나라를 지킬 것인가, 하지만 그들이 전쟁터로 나가면 가족들은 또 누가 돌봐줄 것인가...
6.25 전쟁때 죽어나간 수많은 군인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할아버지나 그 세대분들도 자진해서 출전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어쩔수 없는 상황에 못이겨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전쟁터에 나가신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나라를 그리고 가족을 위해 전쟁에 몸바쳐 희생하신 그 분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게 되었지만, 그 고귀한 희생의 가치를 제대로 치뤄주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쓰럽고 죄송스럽기까지 하다.
주인공은 불사조?
대부분의 영화에서 그러하듯 여기서도 주인공은 불사조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고들 한다. 주인공을 향해서 날라오는 총알은 모두가 천천히 날라오거나 피해간다는 홍콩 영화처럼 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단지 영웅이야기를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형 진태는 훈장을 타면 동생을 제대시킬 수 있다는 말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것이고, 그것이 아슬아슬하지만 어느 정도 성공을 잘 이룬 이야기의 단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싸우다 죽어간 사람도 수없이 많았고, 또 그런 공로를 인정받고 살아계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 희생정신을 묘사한 내용을 단지 주인공이 불사조로 나오는 다른 영화와 동일시 하기엔 좀 무리가 따른다.
점점더 전쟁광이 되어가는 듯한 형의 모습에 동생 진석은 형을 증오하게 된다. 훈장을 타기 위해 형이 한 행동들 때문에 동료가 죽어나갔고, 그것이 곧 진석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까지 더해져서일 것이다.
하지만 형의 노력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개입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진태는 훈장을 받긴 했으나, 동생의 제대를 약속했던 지휘관은 1.4 후퇴 당시 총격으로 사망했다. 원래 군법상에 그런 제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동생의 제대를 약속한 지휘관의 사망은 또 다른 어려움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지옥같은 세상
진태 일행은 1.4 후퇴로 인해 후방 집결지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흩어졌다. 그 사이 진석이 집엘 들렀으나 어머니는 계시지 않고, 형의 아내가 될 사람인 영신이 누나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곧 어떤 사람들에게 끌려가게 되는데, 이른바 공산당에게 협조한 빨갱이 집단이라는 명목하에 총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진태와 진석이 전쟁에 끌려나가면서 언젠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남쪽으로 피난가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계속 집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먹을 식량이 없다보니 각종 인민대회 등에 모두 참석하면서 배급식량을 받아와 끼니를 때웠던 것...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가족들 먹여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자신들을 지켜줄 남자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버리고는 먹고 살 길이 없어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했던 일 때문에 빨갱이 처단이라는 명목하에 무조건 총살을 시키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국가적으로나 역사적으로만 본다면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라고만 볼 수도 있겠지만, 개개인의 상황으로 비추어보면 눈 앞에서 총을 들이대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 뒤에 있는 자신의 나라 조차도 가족들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이다.
총살 현장에 극적으로 도착한 진석이 나서서 총을 들이대며 영신을 데리고 나가라고 뒤따라온 진태에게 다그치지만, "빨갱이들에게 아랫도리를 바쳐서 쌀을 얻어먹었다"라는 조직원의 말에 진태가 주춤하였고, 결국 일이 꼬여 영신은 죽고 두 사람은 체포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진태는 훈장을 받았던 공로로 풀려났지만 진석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불에 타 죽을 상황까지 가게 된다.
주인공도 사람이다
포로들을 가두고 불을 질렀던 창고에서 진태는 동생의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을 발견한다. 동생이 죽었다고 확신한 진태는 격분하여 포로들을 모두 태워죽일 것을 명령한 장교를 돌맹이로 쳐 죽인 후,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간다.
아무리 전쟁광처럼 보이고, 그리고 불사조같이 무적인 주인공이라 할 지라도 평범한 한 사람이다. 국가의 영광이나 안위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가족이다. 지켜주고자 하는 가족이 없기에 더 이상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울 의미를 잃는 것과 동시에 오히려 동생을 죽게 한 국군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서 북한군에 지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형을 설득하기 위해서 전투속으로 뛰어든 진석이 형을 만났을 때,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피에 굶주린 흉폭한 살인마와 같은 모습이었다. 동생 진석도 알아보지 못한채 주변의 모든 남한 군인들을 죽이려 들 정도로 말이다.
형한테 맞으면서 끝까지 자신이 진석임을 알리자 진태는 표정이 바뀌며 진석을 알아본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사방엔 너무나 많은 북한군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진태는 또 한번 더 형으로서의 동생에 대한 희생정신을 발휘한다. 먼저 내려가라고, 자신도 곧 따라가겠다고 하며 동생을 남한으로 피신시킨 진태는 발칸포같은 총으로 북한군들을 마구 쏘아대다 결국 수없이 많은 총탄을 맞게 된다. 그리고는 무사히 내려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본 후에 그 자리에서 눈을 감게 된다.
( 이때 희야 ㅠ.ㅠ , 찬이 -.ㅡ;; )
정말 슬픈 순간은 따로 있었다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속에서 두 형제에게 닥친 안타까운 순간들이 한두번은 아니었다. 진태가 총을 맞아 죽는 그 장면도 너무나 처절하고 슬펐다. 하지만 정말 하이라이트는 그게 아니었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나이가 지긋해져 진석이 손녀를 데리고 6.25 참전 유물발굴단의 전화를 받고 발굴현장을 찾게 된다. 형 진태가 총을 맞아 쓰러졌던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의 뼈조각들이 있고, 거기에 진석의 만년필이 함께 놓여 있었다. 진태가 창고에서 주은 만년필을 돌려주려고 하자 진석이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서 그때 돌려달라고 했던 그 만년필이었다.
진석은 그때 형을 데려오지 못한 아쉬움이 뼈에 사묻힌 듯 했다. 50년이 넘게 형을 기다리며, 또 형을 찾아다니며 헤맸는데... 돌아와서 만년필을 준다고 약속했는데... 이렇게 여기에 누워있으면 어떻하냐고... 그렇게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진석 할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내 주변의 연세많이 든 할아버지들도 그런 고통이 있을 것이 아닌가. 우리가 보기엔 그저 힘없고 연약한 나이만 잔뜩든 할아버지지만 그 분들도 이와 같진 않아도 비슷한 그런 상황들을 겪었던 세대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 영화에 대해
TV에서도 그외 각종 언론매체에서도 이 영화에 대해서 극찬을 했다. 이미 4명중 한명꼴로 영화를 관람했을 정도로 인정받은 영화이다. 처음에는 단지 돈 많이 투자해서 만든 블록버스터의 하나이기 때문에 평가가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리얼하고 박진감 넘치는 영상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가진, 우리들 세대들 조차도 잘 느끼지 못하는 바로 얼마전에 있었던 전쟁의 아픔을 강렬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단지 잔혹함과 공포만으로 그린 전쟁영화가 아니라, 감정으로써 전쟁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정말 크다고 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다시 장면들을 떠올릴때면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과연 어떻게 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할까... 내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하며, 전쟁터에 나가서는 또 어떻게... 과연 도망치는 졸부가 되진 않을지, 적에게 총을 겨눌 수 있을지, 포탄에 내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그 공포는 어떨지...
정말 생각도 하기 싫은 상상들이 계속적으로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전쟁이란 정말 싫다. 단순히 몇명 영웅이 나타나서 승리를 이끄는 것은 영화나 만화, 게임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쌀 없으면 빵먹고 살면 되지 왜 굶어죽느냐라는 식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지금의 평화를 어떻게 얻은 것인지 모른다면, 이 영화를 보길 추천한다. 단지 수천 수만의 군인이 죽어나간 덕분이 아니라, 정말 뼈져리게 아픈 고통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끝>